역사를 바꾼 독립운동가 안중근 안창호

역사를 바꾼 독립운동가 안중근 안창호

안중근 1879년 출생 1910년 사망  일제강점기에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있는 운동가이다.

1909년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히로부미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2010년 31세의 어린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안중근의 집안은 재산이 많은 양반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대지주였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태어날때 부터 여느 영웅들과 같이 조금 특이 했다고 합니다. 점이 7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고 하여 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공부 보다는 말과 활쏘기를 좋아하던 안중근은 집에 오던 포수들과도 친분이 있어 사냥을 자주 나갔으며, 그 당시부터 사격을 잘했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이 되면서 이에 분노한 안중근은 독립운동에 전념 하였으며, 1907년에는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의 역사적의미

이토히로부미 저격은 두가지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정치인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다른시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저걱으로 한일합병 조약이 앞당겨진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외국의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1878년 출생 1938년 사망 역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입니다.

안창호는 어린시절 자기가 살던 고향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되면서 부터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때 당시 나이가 16세인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모든 집안아 반대를하는 유학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결혼을 하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 보다는 애국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결혼후 배우자와 자녀와 보낸시간이 13년이 안된다고 합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백의 군중이 모든 가운데 18조목의 쾌재와 18조목의 부재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898년 종로에서 이상재와 윤치호 이승만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있는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했습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를 역할을 수행하면서 내실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경제적인 지원 없이 임시정부를 꾸려가는것이 쉽지 않았던것이 사실입니다.

이후 분열된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사임을 하셨습니다. 그 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으며 이때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지만 공산당의 전략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30년1월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구등과 함께 한국도릭립당을 경성하고 대공주의를 주창했습니다. 그 후 일년 뒤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에서의 이상촌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 토지를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해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검토하는주에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며 4년의 실형을 받았지만 2년6개월 만에 가출옥을 하게 되어 지방순회를 통해 국민들을 각성하는데 힘을 썻지만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송태산장에 은거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칠어 갔는데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수감을 했지만 급격히 건강이 않좋아져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그 다음에 3월에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 안창호는 무실역행을 주장했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행하자는것인데 이를 토애 자기개조와 함께 민족개조를 염원했다고 합니다.

그의 활동을 보면 학교 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 교육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을 보면 안창호의 교육이념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했는데 점진공부를 살펴보면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써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여 항상을 기하자는것을 보면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의에 죽는것이 효도다 조마리아

조마리아 출생배경

조마리아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마리아 가문은 선조때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과 함께 효종때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ㄷ종대 통정대부 폼계를 받은 조응건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조마리아 고조부인 조완옥은 무과를 급제한 된 종6품 주부로 봉직했으니 이전과는 다르게 무과를 통해 관직진출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 결혼

조마리아는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인 안태훈과 혼인했습니다. 본래 해주부 항리가문이었지만 5조대부터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명망있는 무반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났는데 일찍히 사시에 합격해 안진사로 불렸으며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평소 개신교와 천주교에 관심이 있었던 안태훈은 1896년 명동성당을 찾아가 전주교에 귀의했으며 그 후 형제 아들 조카와 함께 빌렘신부에게 영세를 받는 후 모든 가죽이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 사이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등 3남1녀를 두었으며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장남은 중국에 있는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차남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삼남은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성사시켰고 딸은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거와 해외망명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의 교장직을 사직하며 조마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는데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같은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안중근은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노숙하며 독립은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09년10월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 혁명운동가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서구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에 직면해야 하는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청계동에 있는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색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생들도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중근의 면회를 가기 위해 인천에 당도했을때도 수일간 구류와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당차고 의기로운 여인 조마리아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국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 없었던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가려 하는 아들에게 안중근에게 전하던 말이 있는데 이와 같습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런 당부를 남겼습니다. 나중에는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마리아는 사촌동생인 안명근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해주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아들을 보내고 조마리아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습니다. 고국에 있음으로 일제의 탄압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풀이됩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안중근의 유족은 그 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때 연해주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인 최재형의 손을 거쳐 유족들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안창호의 도음으로 크라스키노롤 거쳐 동청철도 동부상의 목릉(물린) 필면통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이곳은 서북출신이 많이 살고 있으며 미간지가 넓은곳이라 합니다.

안정근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운영해 생활비를 벌었고 공근은 형의 지원으로 러시아 수로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1914년 3월 조마리아는 유족과 목릉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0km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했으며 이때 황해도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 벼농사가 성공해 이를 개기로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이때 조마리아는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동포들의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상해생활과 임시정부 지원활동

1919년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1919년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친형제와 같이 지내던 정근에게 임정의 외각단체라 할 수 있는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이 맡겼습니다.

아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호라동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습니다. 1922년 4월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해 농장 개척을 통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했습니다.

상해서 조마리아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동기처럼 지냈으며 동포들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당사자들은 조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천주교인으로써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조마리아는 셋째아들 공근에게 의지했지만 혼자서 11명을 먹어살릴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있었는데 이때 국립기남학교 기남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마리아는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추친했습니다. 1927년7월19일 상허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에 모여 안창호의 사회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개최해 의원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한국독립사에 끼친 영향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을정도로 신망이 높았습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입니다.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한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 7월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에 별세했으며 사인은 위암이었습니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의 월남묘지에 인장되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묘지터가 파괴되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치욕스러운 을미사변

치욕스러운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에 당시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경북궁에서 시해를 당한 사건입니다.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이름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을미사변 개요

한일합방의 가장 큰 문제는 명성황후였습니다. 경북궁 안으로 진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연못에 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낭인들에 소행으로 주장해 왔지만, 주동자인 미우라의 경우는 일본에 실권자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성황후 시해 당시 궁녀들에게 명성황후의 거처를 물으며 난동을 부렸지만 찾지 못하였으며, 하지만 결국 황후를 찾아냈고 시해를 막기 위해  막았던 이경직은 권총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황후는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구걸했다고 합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과 흥성대원군

고종은 시해 사건의 배후에 흥성대원군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둘 사이에 관계는 악화될 때로 악화되었고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이 눈을 감았을 때도 고종은 장례식조차 방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명성황후의 신변을 걱정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하였지만 피신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아관파천과 의병들의 봉기 그리고 대한제국 설립의 원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흥성대원군이 일본에 제거 요청을 했다고 주장을 하고있지만 이 평가에 대해서는 대원군이 일본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누명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을미사변이 끝난 다음날 고종은 일본에 지난밤 일의 내막에 대해 물어봤지만, 일본은 고정을 협박하여 본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 내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를 대원군의 소행이라고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일의 주동자인 미우라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의 반란이라고 했으며, 주변 사람들을 매수해 일본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일본에 반하는 민비를 제거 함으로서 일본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많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으며 반일 감정이 높아지면서 시해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여러 가지 가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문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민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한다는 문서인데 시해 당시 궁녀만 죽었고 명성황후는 탈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퍼 트리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을사오적 친일파 이완용

을사오적 친일파 이완용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은 1882년 과거 급제를 하여 내각총리로 높은 벼슬을 했으며, 을사조약 및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앞장서 대한 제국을 멸망하게 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사후에는 전북에 묻혔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묘지가 훼손되어 후손들이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완용 정치활동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에서 태어났지만 1867년에 입양이 되었고 입양된 가정은 이호준이었습니다. 이호준은 그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의 친구일 뿐 아니라 최 측근 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호준 직계 선조들은 대대로 왕실의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히나 이완용이 정권 실세로 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완용을 입양하면서 이완용의 친부는 말단 관직을 얻었으며, 이완용은 집에 막내였기 때문에 입양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좋았던 이완용은 이호준에게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요직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호준과 이완용은 대원군과의 결탁을 끊고 민씨와 손을 잡는다.

친일파로서의 이완용

과거 급제후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5년이 안 걸린 인재로 고종이 좋게 보았습니다. 보통 민씨 정권을 등에 없고 고위직 관리로 올라갔지만 이완용은 본인에 실력으로 고종의 눈에  들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1985년 이호준과 이완용은 러시아와 접촉을 시도하고있었는데,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완용 또한 위험하였으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개기로 을미개혁을 단행했지만 러시아의 개입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완용은 당시 친러를 하면서 일본을 견제하였으며, 당시에는 친일파이기보다는 정치인으로서 실리를 찾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친미 성향이 강하였으며, 친러나 친일파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나 일본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여 영어로 소통을 하거나 아니면 통역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친미를 하는 이완용을 러시아는 불만스러웠고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좌천시키게 된다. 이완용은 지방에 내려와서 지내다 양아버지인 이호준이 쓰러지면서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이호준이 사망하고 3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정계를 떠나게 됩니다.

이완용은 3년 상을 치르고 양 아버지였던 이호준의 뒤를 이어 수구파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호준이 없는 이완용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눈앞이라는 점과 미국에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에 대리인 역활을 하면서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일본에게 국권을 넘기면서 이완용은 엄청난 이권과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그 이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며, 일본에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10년 이완용은 한일 병합 조약을 통과시키고 백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친일 행각은 계속되었습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불순세력이고 조선 독립의 꿈은 꾸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마지막

1909년에 암살될뻔했지만 상처를 입고 살아난 이완용 하지만 겨울만 되면 그때 상처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지병으로 인하여 1926년 사망하게 됩니다.

다시보는 독립운동가 김원봉

다시 보는 독립운동가 김원봉

최근 많은 영화에 김원봉이 나오면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김원봉

김원봉은 1898년 9월생으로 1958년까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며, 북한의 정치인이었습니다. 1919년에 의열단을 창설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했습니다.

김원봉의 의열단

무장독립단체로 무력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단체로 김원봉이 단장으로 이끌었습니다.  무장 투쟁을 하면서 제거해야 할 사람으로 조선 총독부 및 관리들 일본군 고위 간부, 밀정, 친일파 등을 꼽았습니다.

김원봉의 월북

김원봉은 1948년 4월에 월북을 하였는데 그 이유가 친일파들의 탄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김원봉은 1958년에 김일성에 반하는 인사들을 숙청함으로써 김원봉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김원봉의 논란들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원봉은 본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밝혔습니다.

김원봉은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고 감옥에서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유공자 및 훈장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가 이긴 하지만 공산당 쪽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과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원봉은 북한의 고위 인사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을 위하여 싸운 인물이기 때문에 충분히 유공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밝혔지만, 많은 정치 인사들이 이를 반대하고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구

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독립단체인 의열단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 김구는 조선시대에 양반이었고 과거에도 응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 응시 낙방 후 동학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김구의 호는 백범으로 뜻은 백정도 일반 사람과 같다는 평등을 말합니다. 또한 김구는 신민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국내보다는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지마 실효성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1924년 친일파 암살 그리고 일본 공사관 습격 등 윤봉길, 이봉창의 사건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김구의 어린 시절

김구는 양반이었지만 몰락한 양반이었습니다. 김구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장애인이 되었고, 그렇지만 김구는 학업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7세에 첫 과거를 보았고 본인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신분을 벗어나길 바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시대 상황은 이미 매관매직이 일반화되어있어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게 당연시 여겨졌기때문에 이런 시험 부정을 보고 김구는 과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김구의 청소년 시절

김구는 동학에 참여하게 되고 이름도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동학에 들어간지 1년도 체 안되어 많은 신도를 모으게 되었고 김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학에서는 김구에 대한 인지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동학의 창시자 최시형과 자주 만났으며,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면서 군대를 진두지위하였습니다.

치하포 사건

김구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수상히 여겨 을미사변을 일으킨 사람 중에 한 명이라 생각하고 살해하였고, 그 이유는 명성황후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김구는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사형을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의 김구의 생활

김구는 감옥에서도 배움을 개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간수에게 부탁하여 많은 책을 읽었으며,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을 가르치면서 학교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당시 안창호는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을 하고 있었고 김구를 경무국장에 추천하였습니다. 처음에 김구는 자신의 배움이 낮아 거절을 하였지만 이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임시정부의 위기

1920년 임시정부는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임정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에 저항

친일파 척결 1924년 친일파인 최창규 가족을 낮에 토벌하였고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인의 친일파 암살 특공대였던 김병현, 박희광, 김광추는 친일파 및 일본 장성들의 군자금을 탈취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김광추는 순국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체포 되었습니다.

1932년 2월에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이봉창이 일본 관병식에 참가하는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지만 미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해 4월에 윤봉길과 훙커우 공원 천장 절이라는 기념식에서 의거를 지휘하였습니다.

김원봉에 대해서

 

 

일제 강점기 행정과 정치 교육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 3편

일제 강점기 행정과 정치

조선 총독부가 행정과 정치에도 전반적으로 관여를 하였습니다. 보통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향리의 세습을 폐지하면서 공개적으로 채용을 통하여 뽑았으며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배치가 되었지만 현병과 경찰의 보조원은 한국 사람으로 충원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언론

강점기의 언론을 보면 특별한 제한은 없었지만 검열은 필수로 진행 했어야 합니다. 한글과 일본어를 혼용해서 발행을 했어야 하며, 독립운동을 지지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는 1940년에 최종 폐간되었으며 친일 신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교육

기존에 교육은 양반들 위주의 서당교육으로 한문 위주의 수업이었으며 한글 수업이나 수학은 따로 교육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만든 교과서는 일본이 몰수하였고, 일본인이 저술한 교과서로 대체하였습니다. 일본은 말기에는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였고, 일본어를 배우게 시켰습니다. 또한 학교 선생들에게도 제복과 칼을 차게 했으며, 초등학생에게까지 강제로 군사시설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런 일본의 정책으로 인하여 인구의 40% 정도가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상황

일제강점기 초기상황

일제 강점기 사회상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 2편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를 합니다. 그로 인하여 독립도 하게 되게 됩니다.

독립운동과 일제 식민지 시대의 상황 및 사건

1910년 국내 및 외국의 독립운동

1911년 신민회의 간부들이 대다수 검거가 되면서 신민회는 해산되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무단 통치 시기에 억압과 핍박이 심해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항일운동 투사들은 점점 더 비밀리에 활동을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만 항일운동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무단통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수십만 명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에 엄청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200만 명이나 되는 국민이 참여하였으며 기간도 2개월이나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으로 1400여 건의 운동이 일어났고 160여 개의 기관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에 의해 4월경에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3.1 운동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가 양산되었습니다.

1920년대 사회상

2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관료가 되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응시를 했으며, 2:1 정도로 되던 경쟁률은 10: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헌병 보조원들은 인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독립이 되기 전까지 경쟁률은 계속 올라 20:1의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의도치 않은 개방으로 양복, 원피스 같은 서양문물들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존 유교사상이 많이 빠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보수인 유교 사상가들은 이를 두고 일본이 탈선을 주도하여 한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이혼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유교사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서양 문물이 확산되면서 이혼에 대한 개념 또한 바뀌었습니다.

1930년대 사회상

1930년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글과 글을 깨우쳐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운동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였고 이 운동에 지식인들 또한 참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8년 일본의 억압으로 이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39년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하라고 규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자국에서 진행을 한 것이 아니라 총독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진행이 된 창씨개명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총독이 경질이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독립운동가였던 이광수는 친일로 돌아서면서 창씨개명을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창씨개명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으며, 반발이 너무가 컸습니다. 일본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과 한국 사람의 구분이 어렵다. 라고는 주장했고 총독부에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창씨개명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가장 어려운 시기

징용 및 위안부

중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은 더 많은 진출을 하고자 준비를 하면서 징용자와 위안부를 모집하였습니다. 광고로 속여서 자발적으로 온 것처럼 꾸며서 많은 사람들이 징용을 가고 위안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끌려간 위안부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가 한국 사람이었으며 인원은 4만에서 30만 명에 달합니다.

1930년대에 김구는 일본의 천황을 암살하려 이봉창을 시켰지만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또한 윤봉길은 일본 큰 행사에서 폭탄으로 일본인 사상자를 내면서 김구는 수배가 되어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 1편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 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입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았던 기간은 약 35년이며 1910년에 일본의 왕명을 받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식민통치를 하였습니다. 또한 외교 및 정치에 대한 권한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통치 시기에 통치 정책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1910년~1919년까지 민족 학살 정책 1919년~1931년과 1931년~1945년 민족말살 정책으로 분류가 됩니다. 8월 15일 일본의 패배로 인해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철수하지 않았으며, 9월 2일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나서야  9월 28일 완전히 철수를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배경

일본은 산업화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가장  큰문제인 공급과잉으로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섬나라의 특성상 시장  개척의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신민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서 기존에 막부가 종식되며,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되었으며, 개방을 통하여 많은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빠른 발전과 산업화가 되었습니다.

기존에 다른 열강들이 식민지를 통치했던 것과 비슷하게 일본도 같은 방법으로 조선을 식민지화 시켰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수교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자는 명분을 가지고 진출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흥성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조정의 권력 다툼으로 명성황후는 개화 파인 친일을 지지하였지만 추후 청나라의 병력을 이용하여 실권을 잡으려고 하는 친일 인사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였습니다.

1876년에 강화도 조약 이후에 많은 사건이 벌어졌으며, 일본은 청일전쟁과 1905년에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습니다. 또한 이때 일진회 그리고 이완용이 일본과의 한일합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09년 7월 대한 제국의 흡수를  일본에서 결정을 내렸고, 10월 26일에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암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일본은 대한 제국과의 합병을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듬해 8월에 한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때부터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35년간 식민통치를 받으며 많은 국민들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일합병 초반 (1910년 ~1919년) 무단통치기로 불림

1910년 9월 총독부는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고, 헌병 경찰을 도입하여 즉결 처분권을 주었습니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출판,집회 또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에 임명이된 총독은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입법은 물론이고 사법 및 행정권까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 총독부 산하에 장장 2만명이나 되는 헌병들을 배치 하였으며, 이를 도운 조선인 보조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헌병들의 주업무는 억압과 치안을 담당하였고 특히나 독립운동가의 색출이 주업무였습니다.

산업,토지 수탈과 사업 제한으로 성장을 억제하며, 일본의 기업이나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본 기업이나 시민들에게 많은 혜택이 있다보니 해방되기 얼마전에는 일본인 이주자가 40만명에 육박 하였습니다.

한일 합병 중반 (1919년 ~ 1931년) 문화 통치 시기로 불림

3.1운동으로 인하여 기존에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낀 일본은 기존에 통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후에 다른 총독이 부임하면서, 강압적인 것보다 회유하는 방법으로 통치 스타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일 합병 초반에 억압되었던 언론이나 집회 그리고 교육에 대한 활동이 허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겉모습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총독부의 방향

  • 많은 모임들 종교나 교육계에 침투하여 친을 단체를 조직하고 친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게 되었습니다.
  • 원조와 편의를 제공하여 많은 친일인사들을 만든다.
  • 당시 주산업이었던 농민들에게 혜택을 주면서 친을 단체에 가입하도록 회유함
  • 헌병 제도를 경찰 제로 바꾸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억압은 더 심해졌습니다.

한일 합병 후반 (1931년 ~ 1945년)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일본의 야망은 계속되었던 시기 1931년에 중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시기였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하였으며, 1940년에 태평양전쟁까지 많은 군인들을 일본에서 착취해 갔습니다. 또한 한국의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하에 강제로 동원했으며,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한 사과가 정확히 이루어 지공 있지 않았습니다.

민족 말살정책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으로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역사나 글 말을 배울 수 없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