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독립운동가 안중근 안창호

역사를 바꾼 독립운동가 안중근 안창호

안중근 1879년 출생 1910년 사망  일제강점기에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있는 운동가이다.

1909년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히로부미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2010년 31세의 어린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안중근의 집안은 재산이 많은 양반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대지주였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태어날때 부터 여느 영웅들과 같이 조금 특이 했다고 합니다. 점이 7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았다고 하여 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공부 보다는 말과 활쏘기를 좋아하던 안중근은 집에 오던 포수들과도 친분이 있어 사냥을 자주 나갔으며, 그 당시부터 사격을 잘했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이 되면서 이에 분노한 안중근은 독립운동에 전념 하였으며, 1907년에는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의 역사적의미

이토히로부미 저격은 두가지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정치인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다른시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 저걱으로 한일합병 조약이 앞당겨진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외국의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1878년 출생 1938년 사망 역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입니다.

안창호는 어린시절 자기가 살던 고향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되면서 부터 변하기 시작하였고 그때 당시 나이가 16세인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모든 집안아 반대를하는 유학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결혼을 하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 보다는 애국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결혼후 배우자와 자녀와 보낸시간이 13년이 안된다고 합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백의 군중이 모든 가운데 18조목의 쾌재와 18조목의 부재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1898년 종로에서 이상재와 윤치호 이승만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있는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때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했습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를 역할을 수행하면서 내실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경제적인 지원 없이 임시정부를 꾸려가는것이 쉽지 않았던것이 사실입니다.

이후 분열된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사임을 하셨습니다. 그 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으며 이때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지만 공산당의 전략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30년1월 상해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구등과 함께 한국도릭립당을 경성하고 대공주의를 주창했습니다. 그 후 일년 뒤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에서의 이상촌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 토지를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해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검토하는주에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며 4년의 실형을 받았지만 2년6개월 만에 가출옥을 하게 되어 지방순회를 통해 국민들을 각성하는데 힘을 썻지만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송태산장에 은거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칠어 갔는데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수감을 했지만 급격히 건강이 않좋아져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그 다음에 3월에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 안창호는 무실역행을 주장했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은 힘써행하자는것인데 이를 토애 자기개조와 함께 민족개조를 염원했다고 합니다.

그의 활동을 보면 학교 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 교육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을 보면 안창호의 교육이념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했는데 점진공부를 살펴보면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써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여 항상을 기하자는것을 보면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의에 죽는것이 효도다 조마리아

조마리아 출생배경

조마리아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마리아 가문은 선조때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과 함께 효종때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ㄷ종대 통정대부 폼계를 받은 조응건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조마리아 고조부인 조완옥은 무과를 급제한 된 종6품 주부로 봉직했으니 이전과는 다르게 무과를 통해 관직진출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 결혼

조마리아는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인 안태훈과 혼인했습니다. 본래 해주부 항리가문이었지만 5조대부터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명망있는 무반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났는데 일찍히 사시에 합격해 안진사로 불렸으며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평소 개신교와 천주교에 관심이 있었던 안태훈은 1896년 명동성당을 찾아가 전주교에 귀의했으며 그 후 형제 아들 조카와 함께 빌렘신부에게 영세를 받는 후 모든 가죽이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 사이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등 3남1녀를 두었으며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장남은 중국에 있는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차남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삼남은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성사시켰고 딸은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거와 해외망명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의 교장직을 사직하며 조마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는데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같은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안중근은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노숙하며 독립은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09년10월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 혁명운동가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서구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에 직면해야 하는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청계동에 있는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색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생들도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중근의 면회를 가기 위해 인천에 당도했을때도 수일간 구류와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당차고 의기로운 여인 조마리아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국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 없었던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가려 하는 아들에게 안중근에게 전하던 말이 있는데 이와 같습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런 당부를 남겼습니다. 나중에는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마리아는 사촌동생인 안명근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해주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아들을 보내고 조마리아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습니다. 고국에 있음으로 일제의 탄압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풀이됩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안중근의 유족은 그 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때 연해주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인 최재형의 손을 거쳐 유족들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안창호의 도음으로 크라스키노롤 거쳐 동청철도 동부상의 목릉(물린) 필면통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이곳은 서북출신이 많이 살고 있으며 미간지가 넓은곳이라 합니다.

안정근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운영해 생활비를 벌었고 공근은 형의 지원으로 러시아 수로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1914년 3월 조마리아는 유족과 목릉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0km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했으며 이때 황해도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 벼농사가 성공해 이를 개기로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이때 조마리아는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동포들의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상해생활과 임시정부 지원활동

1919년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1919년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친형제와 같이 지내던 정근에게 임정의 외각단체라 할 수 있는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이 맡겼습니다.

아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호라동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습니다. 1922년 4월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해 농장 개척을 통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했습니다.

상해서 조마리아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동기처럼 지냈으며 동포들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당사자들은 조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천주교인으로써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조마리아는 셋째아들 공근에게 의지했지만 혼자서 11명을 먹어살릴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있었는데 이때 국립기남학교 기남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마리아는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추친했습니다. 1927년7월19일 상허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에 모여 안창호의 사회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개최해 의원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한국독립사에 끼친 영향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을정도로 신망이 높았습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입니다.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한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 7월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에 별세했으며 사인은 위암이었습니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의 월남묘지에 인장되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묘지터가 파괴되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