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스러운 을미사변

치욕스러운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에 당시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경북궁에서 시해를 당한 사건입니다.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이름을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을미사변 개요

한일합방의 가장 큰 문제는 명성황후였습니다. 경북궁 안으로 진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연못에 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낭인들에 소행으로 주장해 왔지만, 주동자인 미우라의 경우는 일본에 실권자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성황후 시해 당시 궁녀들에게 명성황후의 거처를 물으며 난동을 부렸지만 찾지 못하였으며, 하지만 결국 황후를 찾아냈고 시해를 막기 위해  막았던 이경직은 권총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황후는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구걸했다고 합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과 흥성대원군

고종은 시해 사건의 배후에 흥성대원군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둘 사이에 관계는 악화될 때로 악화되었고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이 눈을 감았을 때도 고종은 장례식조차 방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고종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명성황후의 신변을 걱정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하였지만 피신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아관파천과 의병들의 봉기 그리고 대한제국 설립의 원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흥성대원군이 일본에 제거 요청을 했다고 주장을 하고있지만 이 평가에 대해서는 대원군이 일본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누명이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을미사변이 끝난 다음날 고종은 일본에 지난밤 일의 내막에 대해 물어봤지만, 일본은 고정을 협박하여 본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 내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를 대원군의 소행이라고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일의 주동자인 미우라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의 반란이라고 했으며, 주변 사람들을 매수해 일본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일본에 반하는 민비를 제거 함으로서 일본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많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으며 반일 감정이 높아지면서 시해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여러 가지 가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문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민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한다는 문서인데 시해 당시 궁녀만 죽었고 명성황후는 탈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퍼 트리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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