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사회상

대한민국 일제 강점기 2편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패배를 합니다. 그로 인하여 독립도 하게 되게 됩니다.

독립운동과 일제 식민지 시대의 상황 및 사건

1910년 국내 및 외국의 독립운동

1911년 신민회의 간부들이 대다수 검거가 되면서 신민회는 해산되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무단 통치 시기에 억압과 핍박이 심해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항일운동 투사들은 점점 더 비밀리에 활동을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만 항일운동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무단통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수십만 명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에 엄청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습니다. 200만 명이나 되는 국민이 참여하였으며 기간도 2개월이나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으로 1400여 건의 운동이 일어났고 160여 개의 기관이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에 의해 4월경에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3.1 운동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가 양산되었습니다.

1920년대 사회상

2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관료가 되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응시를 했으며, 2:1 정도로 되던 경쟁률은 10: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헌병 보조원들은 인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독립이 되기 전까지 경쟁률은 계속 올라 20:1의 경쟁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 의도치 않은 개방으로 양복, 원피스 같은 서양문물들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존 유교사상이 많이 빠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보수인 유교 사상가들은 이를 두고 일본이 탈선을 주도하여 한국을 망하게 할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이혼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유교사상에서는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서양 문물이 확산되면서 이혼에 대한 개념 또한 바뀌었습니다.

1930년대 사회상

1930년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글과 글을 깨우쳐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운동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였고 이 운동에 지식인들 또한 참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1938년 일본의 억압으로 이 운동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1939년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하라고 규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자국에서 진행을 한 것이 아니라 총독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진행이 된 창씨개명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총독이 경질이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독립운동가였던 이광수는 친일로 돌아서면서 창씨개명을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창씨개명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으며, 반발이 너무가 컸습니다. 일본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자국민과 한국 사람의 구분이 어렵다. 라고는 주장했고 총독부에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창씨개명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가장 어려운 시기

징용 및 위안부

중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은 더 많은 진출을 하고자 준비를 하면서 징용자와 위안부를 모집하였습니다. 광고로 속여서 자발적으로 온 것처럼 꾸며서 많은 사람들이 징용을 가고 위안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끌려간 위안부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가 한국 사람이었으며 인원은 4만에서 30만 명에 달합니다.

1930년대에 김구는 일본의 천황을 암살하려 이봉창을 시켰지만 계획은 실패하였습니다. 또한 윤봉길은 일본 큰 행사에서 폭탄으로 일본인 사상자를 내면서 김구는 수배가 되어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