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구

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독립단체인 의열단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 김구는 조선시대에 양반이었고 과거에도 응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거 응시 낙방 후 동학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김구의 호는 백범으로 뜻은 백정도 일반 사람과 같다는 평등을 말합니다. 또한 김구는 신민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국내보다는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지마 실효성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1924년 친일파 암살 그리고 일본 공사관 습격 등 윤봉길, 이봉창의 사건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김구의 어린 시절

김구는 양반이었지만 몰락한 양반이었습니다. 김구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장애인이 되었고, 그렇지만 김구는 학업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7세에 첫 과거를 보았고 본인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신분을 벗어나길 바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시대 상황은 이미 매관매직이 일반화되어있어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게 당연시 여겨졌기때문에 이런 시험 부정을 보고 김구는 과거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김구의 청소년 시절

김구는 동학에 참여하게 되고 이름도 개명을 했다고 합니다. 동학에 들어간지 1년도 체 안되어 많은 신도를 모으게 되었고 김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학에서는 김구에 대한 인지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동학의 창시자 최시형과 자주 만났으며,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면서 군대를 진두지위하였습니다.

치하포 사건

김구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수상히 여겨 을미사변을 일으킨 사람 중에 한 명이라 생각하고 살해하였고, 그 이유는 명성황후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후 김구는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사형을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의 김구의 생활

김구는 감옥에서도 배움을 개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간수에게 부탁하여 많은 책을 읽었으며, 감옥 안에서도 죄수들을 가르치면서 학교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당시 안창호는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을 하고 있었고 김구를 경무국장에 추천하였습니다. 처음에 김구는 자신의 배움이 낮아 거절을 하였지만 이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임시정부의 위기

1920년 임시정부는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임정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에 저항

친일파 척결 1924년 친일파인 최창규 가족을 낮에 토벌하였고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인의 친일파 암살 특공대였던 김병현, 박희광, 김광추는 친일파 및 일본 장성들의 군자금을 탈취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김광추는 순국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체포 되었습니다.

1932년 2월에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이봉창이 일본 관병식에 참가하는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지만 미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해 4월에 윤봉길과 훙커우 공원 천장 절이라는 기념식에서 의거를 지휘하였습니다.

김원봉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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