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친일파 이완용

을사오적 친일파 이완용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은 1882년 과거 급제를 하여 내각총리로 높은 벼슬을 했으며, 을사조약 및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앞장서 대한 제국을 멸망하게 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사후에는 전북에 묻혔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묘지가 훼손되어 후손들이 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완용 정치활동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에서 태어났지만 1867년에 입양이 되었고 입양된 가정은 이호준이었습니다. 이호준은 그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의 친구일 뿐 아니라 최 측근 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호준 직계 선조들은 대대로 왕실의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히나 이완용이 정권 실세로 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완용을 입양하면서 이완용의 친부는 말단 관직을 얻었으며, 이완용은 집에 막내였기 때문에 입양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좋았던 이완용은 이호준에게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요직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호준과 이완용은 대원군과의 결탁을 끊고 민씨와 손을 잡는다.

친일파로서의 이완용

과거 급제후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5년이 안 걸린 인재로 고종이 좋게 보았습니다. 보통 민씨 정권을 등에 없고 고위직 관리로 올라갔지만 이완용은 본인에 실력으로 고종의 눈에  들어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1985년 이호준과 이완용은 러시아와 접촉을 시도하고있었는데,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에 이완용 또한 위험하였으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개기로 을미개혁을 단행했지만 러시아의 개입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완용은 당시 친러를 하면서 일본을 견제하였으며, 당시에는 친일파이기보다는 정치인으로서 실리를 찾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친미 성향이 강하였으며, 친러나 친일파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나 일본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여 영어로 소통을 하거나 아니면 통역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친미를 하는 이완용을 러시아는 불만스러웠고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좌천시키게 된다. 이완용은 지방에 내려와서 지내다 양아버지인 이호준이 쓰러지면서 다시 복귀하게 되었고 이호준이 사망하고 3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정계를 떠나게 됩니다.

이완용은 3년 상을 치르고 양 아버지였던 이호준의 뒤를 이어 수구파의 최고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호준이 없는 이완용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눈앞이라는 점과 미국에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에 대리인 역활을 하면서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일본에게 국권을 넘기면서 이완용은 엄청난 이권과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그 이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며, 일본에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910년 이완용은 한일 병합 조약을 통과시키고 백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친일 행각은 계속되었습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불순세력이고 조선 독립의 꿈은 꾸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마지막

1909년에 암살될뻔했지만 상처를 입고 살아난 이완용 하지만 겨울만 되면 그때 상처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지병으로 인하여 1926년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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