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에 죽는것이 효도다 조마리아

조마리아 출생배경

조마리아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마리아 가문은 선조때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과 함께 효종때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 현ㄷ종대 통정대부 폼계를 받은 조응건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조마리아 고조부인 조완옥은 무과를 급제한 된 종6품 주부로 봉직했으니 이전과는 다르게 무과를 통해 관직진출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 결혼

조마리아는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인 안태훈과 혼인했습니다. 본래 해주부 항리가문이었지만 5조대부터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명망있는 무반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과 함께 황해도 내 양대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났는데 일찍히 사시에 합격해 안진사로 불렸으며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평소 개신교와 천주교에 관심이 있었던 안태훈은 1896년 명동성당을 찾아가 전주교에 귀의했으며 그 후 형제 아들 조카와 함께 빌렘신부에게 영세를 받는 후 모든 가죽이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 사이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등 3남1녀를 두었으며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장남은 중국에 있는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차남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삼남은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성사시켰고 딸은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거와 해외망명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의 교장직을 사직하며 조마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는데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같은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이 덕분에 안중근은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노숙하며 독립은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09년10월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 혁명운동가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서구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에 직면해야 하는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청계동에 있는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색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동생들도 혹독한 탄압을 받았으며 중근의 면회를 가기 위해 인천에 당도했을때도 수일간 구류와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당차고 의기로운 여인 조마리아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국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 없었던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가려 하는 아들에게 안중근에게 전하던 말이 있는데 이와 같습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런 당부를 남겼습니다. 나중에는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마리아는 사촌동생인 안명근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해주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아들을 보내고 조마리아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습니다. 고국에 있음으로 일제의 탄압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풀이됩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안중근의 유족은 그 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때 연해주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인 최재형의 손을 거쳐 유족들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안창호의 도음으로 크라스키노롤 거쳐 동청철도 동부상의 목릉(물린) 필면통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이곳은 서북출신이 많이 살고 있으며 미간지가 넓은곳이라 합니다.

안정근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운영해 생활비를 벌었고 공근은 형의 지원으로 러시아 수로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1914년 3월 조마리아는 유족과 목릉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0km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했으며 이때 황해도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1919년 벼농사가 성공해 이를 개기로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이때 조마리아는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동포들의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상해생활과 임시정부 지원활동

1919년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1919년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때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친형제와 같이 지내던 정근에게 임정의 외각단체라 할 수 있는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이 맡겼습니다.

아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호라동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습니다. 1922년 4월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해 농장 개척을 통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했습니다.

상해서 조마리아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동기처럼 지냈으며 동포들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당사자들은 조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천주교인으로써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조마리아는 셋째아들 공근에게 의지했지만 혼자서 11명을 먹어살릴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속에 있었는데 이때 국립기남학교 기남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마리아는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추친했습니다. 1927년7월19일 상허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에 모여 안창호의 사회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개최해 의원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한국독립사에 끼친 영향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을정도로 신망이 높았습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입니다.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한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 7월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에 별세했으며 사인은 위암이었습니다.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의 월남묘지에 인장되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묘지터가 파괴되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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